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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아웃포스트>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졌던 실제 전투인 일명 캄데쉬 전투(혹은 키팅 전초기지 전투)를 재현한 전쟁영화입니다. 처음엔 영화 포스트와 제목만 보고 겉만 그럴싸한 B급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상당히 볼만한 영화였습니다. 특히 전투씬 정말 실감나게 잘 재현해서 전쟁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릴만한 작품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영화에 좀 더 몰입하면서 감상하실 수 있도록 실제 전투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간단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영화의 바탕이 된 실제 내용인만큼 자연스럽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아무런 사전정보없이 영화를 감상하시려는 분들은 영화 감상 후에 글을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전투는 2009년 파키스탄 국경과 가까운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 캄데쉬 계곡에 설치되었던 전초기지 <키팅>에서 벌어졌습니다. 캄데쉬 전투는 상당히 유명한 일화로 2012년에 책으로까지 출간되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인원중 2명이 미군 최고의 명예훈장인 메달오브아너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50여년만에 수상되는 메달오브아너였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인원이 다양한 훈장을 받았습니다. 키팅이라는 이름은 2006년 이 기지에서 임무중에 사망한 지휘관 벤자민 키팅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영화 초반에도 등장합니다.)

 

 당시 실제 주둔한 제61기병연대 3대대 B중대 사진

키팅 전초기지는 애초에 군사목적보다는 지역사회를 지원하기 위한 지방지원팀의 기지로 만들어진 곳이였습니다. 그래서 높은 고지에 지어지지않고 산자락 밑 낮은 곳에 건설되었습니다. 덕분에 보급물자와 병력들이 드나들기에는 편리했지만 높은 지형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전술적으로는 사실상 고립된 기지였습니다. 

 

키팅기지 대원들의 초기 주임무는 인근주민들이 파키스탄 국경을 드나드는 것을 막고 지역사회와 친분을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자를 나눠주거나 다양한 친화활동을 벌였는데요. 하지만 문화적 장벽도 너무 높았고 다양한 이유로 지역사회를 포섭하지는 못하게 됩니다.

 

결국 키팅기지는 지역사회 포섭에서 점점 진지방어 중심으로 역할이 변하게 됩니다. 그 이후 탈레반이 점점 키팅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들은 주변 높은 고지의 이점을 이용해 소수인원이 기습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사라지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이들의 공격횟수는 한달에 10회 남짓이었습니다.

 

거기에 간간히 5~10분간 짧은 사격을 하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었기에 당시 병사들도 점점 상황에 익숙해지면서 경계심이 무뎌지게 됩니다. 마침 미군 고위 지휘부에서는 '신 아프간 전략'을 수립하고 기존에 외곽 전초기지들을 폐쇄하고 인구밀집지역 중심으로 방어를 집결시키는 전략을 전환합니다.

 

덕분에 키팅기지도 폐쇄가 결정되고 대원들도 곧 이곳들 뜰거라는 생각에 들뜨게 됩니다. 하지만 미군은 '바르게 마탈'이라는 지역에서 여단급의 대규모 작전을 벌이면서 필요자산들을 이곳에 집중시킨 탓에 키팅기지의 철수에 필요한 수송헬기가 계속 지연되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미군은 실종된 미군들을 찾는데 헬기등을 동원했고 키팅기지는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이 때부터 키팅기지에 대한 공격이 점점 심화되기 시작하는데요. 기존 공격횟수보다 3배많은 47차례의 공격을 9월 한달동안에 받기 시작합니다.

 

키팅기지에 대한 대규모 공격에 대한 우려가 상부에서 나오기도 했고 이와 관련된 정보보고서도 제출되지만 당시 키팅 주둔군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공격의 대부분은 기관총이나 박격포를 이용한 소규모 공격이었고 대부분 5~10분 정도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규모 게릴라 공격에 관한 리포트는 과장되고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부대내에 확산됩니다.

 

하지만 2009년 10월 3일 새벽 6시에 전에는 없었던 대규모 공세가 키팅기지로 들이닥칩니다. 약 400명 규모의 조직적인 부대가 기지 주변의 고지에 엄폐를 한 채 지속적인 사격을 가해옵니다. 당시 50명 남짓이던 키팅기지 인력의 약 8배 규모였습니다. (당시 병력 구성은 미군 53명, 아프간 정부군 42명, 라트비아군 고문 2명이었지만 아프간 정부군은 전투와 동시에 대부분 도망갔다고 합니다.) 적들은 기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지에서 포위한 채 사격을 가했기 때문에 키팅기지로서는 할 수 있는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키팅기지는 12시간동안 포위된 채 전투를 치뤘고 인근 고지에 프리셰라는 박격포를 가진 관측기지가 있었지만 이곳도 공격을 받은 터라 지원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키팅기지 대원들은 압도적인 열세속에서 항공지원이 오기까지 홀로 악몽같은 전투를 치뤄야 했습니다.

 

오전 8시에야 겨우 455 항공원정단 F15 4기와 아파치 헬기들이 도착해 기지상공에서 지원을 시작합니다. 당시 파일럿들은 도착했을 당시 통신 채널로 엄청난 양의 무전이 들어왔고 총구화염이 독립기념일의 폭죽놀이를 보는 것 처럼 화려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전9시경에 정기 순찰 임무를 수행하던 B-1 폭격기가 항공지원 요청을 받고 현장에 나타납니다. B-1 파일럿은 도착했을 당시 진지의 대부분이 불타고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전투가 막바지로 다다르기까지 현장에는 7기의 스트라이크 이글, 4기의 A-10썬더볼트, 2기의 아파치, 1기의 B-1 항공지원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 투입된 지상군에 의해 10월 3일 저녁에서야 진지가 다시 미군의 손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 전투로 인해 당시 주둔중이던 제61기병연대 3대대 B중대는 8명 사망, 27명 부상이라는 손실을 입습니다. 탈레반군은 150여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2013년 오바마 대통령 정부가 전투에 참여했던 클린트 로메샤 상사와 타이 미셸 카터 상병에게 메달오브아너를 수여합니다. 

 

영화 <더 아웃포스트>는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영화는 아니지만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상당히 잘 표현한것 같습니다. 특히 영화의 중요한 장면들은 당시 현장이 있던 인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현장감이 잘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실제인물들의 인터뷰도 있으니 영화를 감상하실 분들은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